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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조선 신도비 탁본 30여종 첫 공개 2010.09.10
  • 대외협력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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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내용


조선조 신도비(神道碑)탁본 30여종 첫 공개

 
       성균관대 박물관 9월 13일부터 석 달간 기획전시
    태조, 태종, 세종, 황희, 한명회, 율곡 등 신도비 눈길
    2品이상 대부만 세워…퇴계 自撰묘갈명 탁본 첫 전시

 조선 전기 신도비(神道碑) 탁본 30여종이 국내 대학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기획전시된다.

 이미지
성균관대학교 박물관(관장 이준식)은 오는 9월 13일(월)부터 11월 30일까지 석 달 동안 ‘조선전기 신도비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 기획전에는 고려 때에는 없었던 국왕 신도비(태조, 태종 2종, 세종 ) 4종의 탁본을 비롯하여 황희, 율곡 이이 등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신도비 30여종의 탁본이 전시된다. 이 중에 세종의 신도비는 조선초 최고의 명필로 일컬어지는 안평대군의 글씨여서 특히 눈길을 끈다(국왕의 신도비는 조선조 이 4종만이 전한다).

 신도비 건립 문화는 중국 후한(後漢) 무렵 묘지 앞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인 ‘궐’(闕)에다 묘역을 알리는 데에서 기원했고, 남북조시대부터 건립되어 당(唐)나라 때 일반화됐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때부터 중국의 입비(立碑) 형식을 수용하여 국사(國師)나 왕사(王師)를 지낸 선사(禪師)의 탑비(塔碑)나 부도비(浮屠碑)가 세워졌는데, 고려말 성리학(性理學)이 보급되면서부터 신도비가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유교문화는 기본적으로 사대부(士大夫), 즉 도학(道學)과 문학(文學)에 종사하는 선비(士)와 그들의 이상을 현실화해나가는 관인(大夫)의 문화였다. 선비의 가장 큰 영예는 평생의 저작을 사후에 제자나 후손들이 정리하여 간행하는 문집(文集)이었으나, 대부에게는 현직․증직을 포함한 2품 이상의 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신도비(神道碑) 건립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의 영향으로 고려시대에 성행한 고승들의 탑비가 거의 사라지고, 유학을 숭상함에 따라 선조(先祖)와 부모에 대한 효행심의 표현으로 분묘을 화려하게 조성하는 풍습이 성행했다. 고려 때에는 없던 국왕의 신도비와 일반 사대부의 묘역에 신도비, 묘표, 묘갈 등이 세워졌던 것이다. 비의 비문은 당대에 명망있는 문장가의 문장과 유명한 서예가들의 글씨를 받아 새겼는데, 비주(碑主)에 대해 지나친 과장이나 칭송의 문장이 많았다. 그 결과, 객관성이 결여되고 내용까지 거짓으로 비춰진 경우도 있다. 대유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자신의 묘갈(墓碣)을 스스로 지었고(탁본이 이번 기획전에 최초로 전시된다), 선조 때의 중신 심수경(沈守慶․1516∼1599)은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인물이지만 신도비 대신 묘갈명(墓碣銘)을 자찬(自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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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란 무엇인가?
  2품 이상의 사대부 관인(官人)의 사후 그가 살던 촌락 입구에 비석 형태로 세울 수 있었으며, 귀한 사람의 묘소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標識) 역할과 비석(碑石)에 새겨진 비주(碑主)의 행적, 세계(世系)를 찬양하는 서(序)와 명(銘)을 통해 비주(碑主)와 후손(後孫)을 홍보하는 역할을 했다. 일반 묘비와는 별도로 건립되었는데, 대개 묘소로부터 가까운 것은 100m 전후, 먼 곳은 1km 이상 떨어진 길가나 촌락 입구에 동남향(東南向)으로 세워졌다(큰 것은 높이 4m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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