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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박물관, <구용의 뉴트로(New-tro), 무위이화> 기획 전시 20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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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박물관, <구용의 뉴트로(New-tro), 무위이화> 기획 전시

- 종합주의를 구현한 ‘한국문학의 대가’ 구용 김영탁 조명

- K-Art를 뉴트로(새로운 전통)으로 읽어낸 ‘문학계의 백남준’

- 성균관대박물관 기획전시실 10월 5일부터 내년 3월 31일까지


“묵념은 등대의 목줄기를 쳐다보며 별들의 숨을 쉰다. 정관(靜觀)은 바다 안개로 피화(皮化)한 가로등 불에서 소리를 발견한다.” - 김구용, 「말하는 풍경」(1959)


성균관대박물관(관장 조환)은 혼란한 한국현대사회를 독특한 색채로 구현한 문학가 구용 김영탁(1922~2001/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삶과 시(詩) 세계를 오늘의 관점에서 해석한 <구용의 New-tro, 무위이화> 전시를 개최한다. 구용에 대해 문학평론가 임우기(김구용 문학전집 편집담당)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시 정신을 논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대시인”이라며, 동양의 정신세계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정서로 표현한 ‘산문시’의 대가로 평가했다.


다방과 산방 사이, 시(詩) 세계를 탐닉하다.

구용의 본명은 영탁(永卓)이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공자의 이름[孔丘]에서 ‘구(丘)’를, 중용에서 ‘용(庸)’을 따온 필명인 ‘구용(丘庸)’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1950년대 전후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한학(漢學)에 대한 깊은 소양을 바탕으로 한문 고전을 생동하는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였으며, 추사를 비롯한 전근대 한국 예술가를 깊이 숭앙했던 서예가이자, 우리대학에서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였다. 구용의 삶에서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한국전쟁이었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 그는 자신의 생존과 문인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다. 이에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환기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수양했으며 동양의 고전에 흠뻑 빠져있던 동학사 사찰의 산방(山房)과, 서구 최신의 문예 기조를 습득하며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유하였던 부산의 다방(茶房)을 전전했다. 이렇듯 성과 속의 공간을 넘나드는 태도는 이후 삶에서도 이어졌다. 또한 전통 시기 옛 문인들을 애호하며 그 정신을 힘든 정신 속에서 재창조하려는 의지도 새롭게 다졌다. 본 전시의 초반파트에서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던 산방의 구용, 다양한 문인들과 교유하며 자신의 예술관을 다듬어간 다방의 구용, 추사 김정희로 대표되는 옛 문인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새롭게 창조해간 구용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문학계에서 불려온 ‘난해성의 벽(壁)’

시각화된 구조 안에서는 ‘초현실적 아방가르드’와 매치되며, 이는 다양한 전통과 현대, 문학과 미술 사이를 융합적으로 파고드는 현시대의 다층적 콜라보를 함축한다. 전시를 통해 살펴본 구용 시의 분석과 해석들이 미완의 비평과제를 남겼다면, 시각과 매치된 글씨와 그림은 오히려 ‘통시성과의 대화’를 시도한 ‘구용스타일’의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서구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시학, 한시의 전통와 선시 등을 종합적으로 연결시킨 부분은 문학을 벗어난 문화재 해석과 당대 화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하되 근본을 꿰뚫는 ‘명쾌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언어에 갇힌 문학가가 아니라, 예술을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정취가 다양한 도판 위에 쓴 자기해석과 맞닿았을 때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용의 글씨와 그림, 초현실을 종합한 전통해석

구용의 무위이화는 ‘통하여 이어지는 해석-전통(傳統)의 현재성’을 보여준다. 이성자의 1974년 현대화랑 개인전 도록 속에는 당대의 여류 추상 그림을 접한 문학가의 자기 해석이 간결한 문체와 글씨 속에서 재발굴된다. 표준어를 넘어선 언어와 기호를 가로지른 섬세한 비평, 아마도 발굴되지 않은 수 많은 화가들과의 교류 속에 ‘구용의 新비평 스타일’이 담겨있을 것이다. 날 서지 않은 즉흥적으로 써내려간 둥그러진 캘리그라피와 같은 글씨 형식은 구전을 자연적으로 시각화한 시(詩)형식을 보여준다. 김구용이 「風味(풍미)」(1970)에서 언급한 “대답은 반문하고 물음은 공간이니 말씀은 썩지 않는다.”는 구절은 정확한 인식이 불가능한 예술해석의 다양한 취향, 이른바 보편구조를 벗어난 21세기라는 탈구조적 개별양식을 예견하고 있다. 그가 읽어내려간 언어의 불협화음들은 낯설게 공존하는 ‘전통을 향한 오늘의 인식’을 보여준다. 이성자의 1972년작 <5월의 도시, 72-no.3>의 원형구조를 “푸른 거울”로 해석한 것이나, 1966년작 <음악이 필어난 잠자리>를 “부풀어 오른 행복, 별은 꽃 피리라”(1974)와 같은 리드미컬한 동시(童詩)와 같이 표현한 것은 그가 기존에 보여준 난해한 시형식과는 또 다른 순수성의 영역을 보여준다. 실제로 구용은 이성자 외에도 천경자와 같은 여류 화가들과 교류함으로써 시각예술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확장구조를 시세계에 반영했을지 모른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한 추사 김정희에 대한 흠모에 대해 최순우 관장이 보낸 <세한도(歲寒圖)> 엽서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듯이, 구용의 네트워크와 신구고금과의 대화는 어떤 인위도 없는 자연스러운 대화-무위이화(無爲而話)의 세계관을 통해 우리에게 이어지는 것이다.


아이같은 캘리그라피, 구용글씨에 담긴 현대성

김구용의 글씨는 최근 유행하는 한글 캘리그라피의 전형으로 평가할 만하다. 간결하면서도 부드러운 필체 위에 날개를 달고 여백 위로 솟는 듯한 섬세한 갈무리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폭발시키는 다이나믹하면서 순수한 마음글씨”를 지향한다. 인간의 삶을 무의식적인 자동기술법 속에서 표출한 시인이기에 구용의 심층이미지를 드러낸 ‘시각과의 매치_콜라보 시리즈’는 더욱 강한 여운을 남긴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기법상의 독특함을 실험적 개념 페인팅을 선보이는 신제현 작가의 <히든사이드>2022 시리즈와 연동시킴으로써 ‘전통-현대’를 뒤섞는 순환의 매치방식을 선보인다.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의 역설을 보여주는 시·공간의 주체해석은 뉴트로 문화로 예견되는 ‘현실과 메타버스’ 세계의 연동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마치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오웰 Good Morning Mr. Orwell>(1984)이 통감각적 SNS 시대를 예견했듯이, 구용의 뒤섞고 해체시키는 종합주의적 해석은 “구용을 오늘에 다시 되살려내야 한다”는 전시의 합목적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구용 전시를 Q&A로 이해하다.  


Q1) 구용 김영탁, 이름이 낯선데, 어떤 사람인가?

구용(1922~2001)은 공자의 이름[孔丘]에서 ‘구(丘)’를, 중용에서 ‘용(庸)’을 따온 필명이다. 1950년대 전후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한문 고전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 추사를 비롯한 전근대 한국 예술가를 흠모했던 서예가, 성균관대학교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였다. 4살 때부터 절과 인연이 있었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징용을 피해 동학사에서 10여 년을 보냈다. 대학시절인 1949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 이후 6편의 산문시를 창작해 <현대문학> 제1회 신인문학상 수상했고, 당시 심사위원은 서정주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생존과 문인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뇌했고, 이를 주옥같은 초현실주적 작품들로 남겼다.

▲구용 김영탁 사진


Q2) 이번에 기획한 <구용의 뉴트로(New-tro), 무위이화>는 어떤 전시인가?

혼란한 한국현대사회를 독특한 색채로 구현한 구용 김영탁의 삶과 시세계를 오늘의 관점에서 해석한 전시이다. 구용 자신도 동양 고전을 번역하고, 문화재 사진에 시조나 불경구를 적어 전통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법고창신의 모습을 지향했다. 한국 문화에 대해 “우리는 우리나라 것의 가치를 널리 선전하지 못하고,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 것의 가치를 높게 평가할 때, 비로소 재인식하는 버릇이 자고로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Q3) 전시 제목에 사용한 ‘무위이화(無爲而化/話)'의 의미는 무엇인가?

도(道)는 스스로 순박한 자연을 따른다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한 노자의 말인데, 저희는 이 대목을 ‘과거와 현재의 대화-話’라는 의미로 번역했다.

▲구용이 그리고 쓴 무위자연


Q4) 공자와 중용에서 따와 필명을 짓고, 고전을 번역해서 전통적인 필체를 상상하는데, 글씨와 그림들이 개성이 넘치는 21세기 캘리그라피를 떠오르게 한다. 아이 같은 상상력이 나온 배경이 있는가?

전쟁이 나자 구용도 부산으로 피난 갔다. 당대 거의 모든 문인들이 부산으로 모였고, 김동리의 주선으로 그들과 다방에 모여 교유할 수 있었다. 당시 다방은 인간성과 예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논담하는 공간이자 서구의 최신 문예 기조를 습득하는 곳이며 예술가들의 개인전이 열리고 원고의 교섭이 이루어져 문인의 생계를 보장하던 세속의 장소였다. 구용은 원고료를 위해서 뭐건 쓰고 싶다고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자신이 추구하는 문학과 다르다는 생각에 늘 고뇌했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환기하는 공간이자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을 체현하는 장소인 산방, 동학사로 돌아갔지만 생존과 문인과의 교유를 보장하는 다방도 포기할 수 없었다.


구용은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문인들과 교유하며 예술관을 다듬어갔다. 그러한 글씨체가 다방과 산방의 교류 속에 잘 녹아든 것 같다. 그래서 글씨체는 어린아이와 같은 동심을, 내용은 시대정신을 아우르는 다양한 의미를 담은게 아닐까.

▲독특한 개성이 있는 구용의 글씨체


Q5) 글씨체가 독특해서 당대 유명한 문인들과 교류가 잦았다고 한다. 구용과 교류하며 작품세계에 영향을 준 사람들, 또 누가 있었나?

유명 문인들 중에 김동리, 서정주를 비롯해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한 문인들이 많았다. 그중에 박종화가 주목받았고, 구용의 글씨도 지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실제로 김동리, 박종화, 박용래 등의 묘비에 글씨를 도맡아 쓰고 문우들의 시집 표제를 직접 써주기도 했다. 구용은 손님을 맞이할 때면 때때로 손님의 필적이나 그림을 요청하기도 했고, 이들끼리 모여 합작도를 만들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나 위창 오창석 시대의 정신을 이어온 행동이 아닐까 한다. “잘 썼건 못 썼건 간에 글을 지어 쓴다는 일은 매우 진지한 자취이다. 그 진지한 흔적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더 귀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다. 또한 붓글씨는 특히 마음의 그림[心畵]여서 사람의 마음씨와 정성이 거기에 드러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성품 덕에 구용과 그의 교우들이 남긴 합작이 많이 남게 되었다.


교유 속에 만들어진 합작

“어효선 씨와 김영태 씨가 왔다. 식사를 겸해 잔을 돌리는데 김영태 씨는 술을 못한다. 그 대신 『현대시학』지에 나의 서재를 소개하는 그림과 글을 만들기 위해 간단한 메모를 한다. 어효선 씨는 내 집에 오면 붓글씨를 쓰고 가기 때문에 지필묵을 내놓고 김영태 씨에게도 몇 폭 쓰기를 권했다. 어효선 씨와 나는 씨가 붓글씨를 쓰면 시서화 삼절이 될 것이라고 권했다.”

- 『일기』 1970.8.21.

▲구용와 당대문인(어효선, 김영태)의 합작도


Q6) 이번 전시 주제 중 하나가 '뉴트로'다. 옛것을 지금에 맞춰 재창조한다는 의미인데, 구용의 뉴트로 작품세계를 자세히 소개한다면?

구용은 평생 추사 김정희의 시와 글씨를 탐독하고 본받기를 바라면서도 그대로 모방하기 보다 스스로의 개성이 드러나는 글씨를 쓰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나는 완당 선생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선생의 작품을 내 나름대로 감상하면 그만이다."라는 언급이 그러하다. 다양한 문화재들을 보고 그 안에 자신만의 느낌들을 감상평처럼 담아 쓴 작품들이 많다. 전통을 오늘에 맞게 재해석하려는 의지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가 아닐까. 우리는 이를 새로운 과거, 다시읽는 복고 라는 의미로 제시한 것이다.

▲구용이 문화재 위에 올려낸 자기 해석


▲추사를 흠모하던 구용에게 보낸 최순우의 편지


Q7) 시인으로서 문학세계는 어땠나?

정지용, 이상, 한용운의 뒤를 잇는 모더니즘, 난해시, 불교적 감성의 시를 쓴 시인. 이미지와 상징성이 깃든 시, 낭만과 감수성을 지닌 시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과 같은 혼란의 시대를 노래했다. 서양의 초현실주의와 같은 기법이나 무의식을 나열한듯한 쉬르 기법이 돋보이고 모더니티를 갖추었으면서도 기저에는 동양적 정서가 깔려있어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Q8) 구용의 작품을 재해석한 새로운 작품들을 소개한다면?

구용의 작품세계와 관련해 플라워 아티스트들과 신제현 작가의 콜라보를 진행했다.  구용의 시 '장미와 철조망' 재해석한 꽃작품을 살펴보자. 그가 X광선을 비치니 철조망이 가슴에 나타난다. 장미꽃이 돌[石]에서 피면 내 몸은 춤을 출까. 동쪽에서 솟는 해는 그림자가 없다. 가슴 속의 장미는 철의 형극(荊棘)에 갇히어 피 끓는다. 시적 이미지를 현장 설치로 재구성한 꽃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리지어 있는 장미는 크게 한 덩어리로 보면 ‘심장’으로, 탱자나무의 날카로운 가시는 ‘혈맥’으로 가시화시켰다. 신제현 작가의 전통 배채기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150호 크기의 신작 <히든 사이드>를 보면, 우리가 구용을 종합예술가라고 봐야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문학계에서 불려온 ‘난해성의 벽(壁)’은 다양한 전통과 현대, 문학과 미술 사이를 융합적으로 파고드는 현시대를 예견한 것이다. 마치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이 조지오웰의 <1984>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통감각적 SNS 시대를 예견했듯이, 구용의 뒤섞고 해체시키는 해석은 “구용을 오늘에 다시 되살려내야 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장미와 철조망을 재해석한 화예작품 (하지수, 이지은)


배채기법으로 구용을 재해석한 신제현의 <히든 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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